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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병원 역사관

인제대학교 백병원은 변화와 혁신을 통해 ‘백병원 100년’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설립자 소개

백병원의 설립자 백인제 박사를 소개합니다.

백인제(白麟濟)

백인제는 1899년 1월 28일 평북 정주의 전통적인 문신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백인제는 1912년~1915년 정주 오산학교를 다녔으며, 재학 4년 동안 수석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정주 오산학교는 평양 대성학교와 함께 항일 비밀결사였다. 신민회의 주요 프로그램중 하나로 설립되었으며, 목표는 장차 국권회복운동에 투신할 인재를 양성하는 곳이었다. 오산학교는 시설, 재정, 교과내용이 우수했고, 그래서 백인제, 김억, 김홍일, 함석헌, 한경직, 김소월 등 각 분야에서 인재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소년시절의 백인제 (왼쪽)
청년시절의 백인제 (오른쪽 끝)
1928년 6월 1일 경의전 외과
주임교수 임용 직후의 백인제
1941년 경의전 졸업앨범에
실린 백인제 박사
백인제는 1916년 경성의학전문학교(이하 경의전)에 입학, 1921년 수석졸업 했다.
사진은 동아일보 1921년 3월 23일자에 게재된 백인제 수석졸업 관련 기사이다.

경의전 공부벌레 백인제, 3·1운동에 참여

백인제는 1916년 경성의학전문학교(이하 경의전)에 입학했으며, 3·1운동 발발 직전까지 3년 동안 단 한번도 수석을 놓치지 않았을 정도로 공부벌레였다. 당시 경의전에는 한국인과 일본인 반이 따로 있었고, 교과과정도 달랐으며, 중요과목의 일본인 반의 수업시수가 훨씬 많았다. 이러한 학교당국의 민족차별과 일부 일본인 교수와 학생들의 오만함, 더 나아가 식민지라는 현실에 울분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한국인 학생들과 백인제는 3·1운동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백인제는 1919년 3월 1일 서울 중심가 시위 때 경찰에 체포되어, 8개월여 동안 고초를 겪었다.

경의전은 1919년 3월 27일 학생들의 선처를 바라는 뜻으로 종로경찰서에 성행조(性行調)를 제출하였으며, 백인제에 대해서는 “명석한 노력가로 항상 우수한 성적으로 얻어 현재 본교 특대생이며, 아무런 결점을 발견하기 어렵다”고 적고 있다. 1919년 11월 6일 최종판결에서 백인제는 징역 6월 집행유예 3년에 처해졌다. 「출판법 및 보안법 위한 피고사건」으로 불린 이 사건에는 72명이 포함되었으며, 이로 인해 백인제는 경의전에서 퇴학당하고 말았다.

경의전 수석졸업, 그리고 전화위복

출옥한 백인제는 상해로 망명해서 직접적인 독립운동에 뛰어들 것인가, 아니면 민족적 설움을 이겨내고 의사와 의학연구자가 될 것인가 고민 끝에 의학공부를 선택했다. 마침 총독부와 경의전의 유화조치에 힘입어 1920년 4월, 4학년으로 복학했고 이듬해 3월 전 학년 수석의 영광을 안은 채 경의전을 졸업했다. 하지만 수석졸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3·1운동에 가담해 했다는 이유로 졸업과 동시에 자동으로 부여되는 의사면허증을 받지 못했다. 총독부의원에서 2년 부수(副率)로 근무하고 나면 의사면허를 내주겠다고 했다. 백인제는 억울했지만 제안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총독부의원 외과에 입국했지만 의사면허가 없는 탓에 온전한 의사역할을 할 수가 없었다. 대신 의사라면 누구나 하기 싫어하는 마취 일을 전담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것이야말로 전화위복이었다. 마취 전문의가 없는 시절의 마취는 외과의사에게 중요한 일이었고, 2년 동안 뛰어난 마취기술을 습득할 수 있었다.
훗날 백인제가 외과의사로 대성할 수 있었던 데에는 탁월한 마취솜씨도 한 몫 단단히 했던 것이다.

1928년 3월 12일 동아일보.
동경제대 박사학위 통과 및 조선인 최초로 경성의학전문학교
외과 주임교수로 내정되었다는 기사이다.

의학박사, 경의전 주임교수 백인제

백인제는 부수생활 2년동안 의학연구에 정진했다. 그 결과 기리하라 교수와 공저로 「일선인 간에 있어서 혈액속별 백분율 차이 및 혈액속별 특유성의 유전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조선의학회 잡지 제40호(1922년 12월)에 발표하였다. 이 논문은 학문적 가치가 우수할 뿐만 아니라 일본인 교수들로부터 인정을 받은 또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마침내 백인제는 1923년 5월 의사면허증을 받았다. 이후 총독부의원에서 온전한 의사의 자격으로 외과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이후 4년 동안 「실험적 구루병의 연구」 등 4편의 논문을 발표 했고, 그 수준이 대단히 높다는 평가를 받았다. 1927년 경의전의 외과 강사로 발탁되었다. 또한 백인제 박사는 논문 「실험적 구루병의 연구」를 도쿄제국대학 의학부에 제출하여 1928년 4월 6일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그해 6월 1일 경의전 외과 주임교수가 되었다. 이는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일곱번째로 나온 의학박사이며, 일제강점기 동안 경의전의 주임교수가 된 사람은 백인제 이외에 미생물교실의 유일준이 유일했다.

1939년 경의전 외과학교실 야유회(뚝섬)

당대 제일의 외과의사 백인제

백인제는 1928년부터 1941년까지 경의전 외과학교실 주임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당대 제일의 외과의사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제자 장기려의 회고담에서 “특히, 각종 질환의 감별 진단에는 어느 누구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정확했다. 당시의 대수술은 선생님의 독무대 같은 인상을 줄 정도였는데, 특히 위궤양, 위암, 간담관, 유암, 갑상선 등의 수술을 받기 위해 오는 환자들이 많았다”고 말했다.

백인제 박사는 한국인 학생은 물론 일본인 학생들 사이에서도 진단의 정확함과 대담하고 정교한 수술, 그리고 명쾌한 강의로 존경의 대상이었다.
특히, 백인제가 명성을 얻게 된 계기를 소개하면, 첫째, 당대 최고의 문학가였던 이광수의 건강이 나빴을때 좌신결핵을 진단하고, 국내 최초로 좌신적출 수술에 성공했다. 둘째, 1937년 장폐색증에 있어서 상부장관 감압술이 유효한 수술임을 세계 최초로 입증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세계학회에서는 1940년 미국의 왕켄스틴이 먼저 보고하였다. 이에 이를 애석하게 여긴 백인제 박사의 일본인 제자들이 백인제 박사의 발표내용을 그림으로 보내주었고, 이 그림은 현재 부산백병원에 보관되어 있다.

경의전 시절 백인제 박사와 장기려
백인제 박사 임상강의 사진 (1930년대 추정)
1937년 장폐색증에 있어서 상부장관 감암술이 유효한 수술임을 세계 최초로 입증하였다.
일본인 제자들이 백인제 박사의 발표내용을 그림으로 그려 보내주었고,
현재 원본은 부산백병원에 보관되어 있다.
백인제 박사는 일찍부터 수혈의 필요성이나 혈액은행의 설립을 강조했다. 매일신보는 1931년 12월12일부터 18일까지 6회에 걸쳐 백인제 박사의 통속의학강연회 ‘수혈’ 강연을 소개했다.

수혈 연구와 백인제 박사

또한 백인제 박사는 수혈분야에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오늘날 한국 근대 수혈의 역사는 한국전쟁 이후에 시작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으나, 실은 백인제 박사의 수혈연구로부터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백인제 박사는 외과수술을 위해서는 수혈에 대한 연구가 불가피하다는 점을 일찍부터 인식하고 있었고, 그 자신의 첫번째 연구인 「일본·한국인 사이에 있어서 혈액속별 백분율 차이 및 특유성의 유전에 대하여」를 1922년 12월 <조선의학회> 제40호에 발표하는 등 수혈 관련 논문을 여러 차례 발표하였다. 당신 외과 강사였던 장기려 박사에 의하면 백인제 박사는 수혈과 공혈자 제도의 필요성을 설명하여 교수회의 승인을 얻어 수혈협회를 외과 내에 두게 되었는데, 이것이 국내 최초의 수혈조직이라 할 수 있다.

또 1931년 수술환자에게 수혈의 필요성을 강조했던 것이나, 1938년 혈액은행의 설립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은 선진국의 의학계에 비해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이는 1954년 초 백병원이 민간병원 최초로 혈액은행을 개설한 것의 바탕의 되었다.

한국의 메이요클리닉을 꿈꾸다.

백인제 박사는 의료혜택을 넓히고 의료인력을 양성하기 위한 구체적이고 장기적인 방안을 구상하고 있었다. 바로 메이요클리닉(Mayo Clinic)과 관련된 부분들이다.

백인제 박사는 1936년 11월부터 1938년 1월까지 의학연구차 유럽과 미국을 시찰하던 중 미국 미네소타주에 있는 메이요클리닉을 방문하고, 미국의 의학이 유럽에 비해 실험과 연구에서 뒤떨어진 반면 임상기술은 더 발달한 것을 발견했다. 메이요클리닉은 시골마을에 있던 사립병원으로 1889년 개원한 뒤 지금까지 세계 명문병원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데, 다른 병원과는 달리 일찍부터 외래진료를 중심으로 하고 특별한 때만 입원을 시키는 당시로는 독특하고 새로운 진료방법을 취하였다. 시골에 위치하고 있으면서도 지역적 한계를 넘어서 환자에게 최고의 의료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대규모의 시설 구비, 임상과 연구를 병행할 수 있는 연구환경 조성, 환자의 재정적 여건을 고려한 의료수가 책정 등 식민지 의료체제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매력적이 요소들이 많았다.

1938년 1월 16일자 조선일보. 백인제 박사가 외국유학을 마치고 귀국했다는 기사.
백인제는 2차 양행가는 길에 선상 기행문을 남겼으며, 이 기행문은 1937년 1월 13일부터 27일까지 조선일보에 11차례에 걸쳐 연재되었다.

1941년 백인제외과병원 개원

백인제 박사는 자신의 연구·진료 활동과 더불어 많은 후학들을 지도 양성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활발한 사회활동을 벌이면서 10여년 동안 지켜온 경의전 외과 주임교수 자리를 사임하고, 스승의 병원을 인수하여 ‘백인제외과병원’을 개업한다.

개업하자마자 명성대로 환자는 몰려들게 되고 한때 입원환자가 70명에 이른 때도 있을 정도로 큰 성공을 거둔다. 백인제 박사의 꿈인 메이요클리닉을 당장 이룰 수는 없지만, 그같은 의료기관을 세울 물적 토대는 점차 충실해져갔다. 백인제 박사는 환자들이 몰려 입원실이 크게 부족하자 1942년 수술실 및 진찰실이 있던 자리에 증축공사를 해 수술실 및 외래, 그리고 병실 7개를 증축했다. 또한 경의전 시절 제자들과 함께 일했는데 이들은 훗날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외과의사로 성장하였다.

1942년 증축공사 중 기념촬영
일본인 간호사 마루따의 귀국을 기념하여 수술실과 진찰실이 있던 신관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 앞줄 가운데가 마루따 간호사, 양쪽에 백인제 박사와 최경진 여사. 수술실과 진료실이 있던 신관을 배경으로 촬영했다.

백인제 박사 왼쪽에 돌양이 보인다. 돌양(石羊)은 병원 창립을 기념하여 백인제 박사가 구해온 것으로 양쪽에 두마리가 있었는 현재는 해운대백병원에 있다.
1942년 증축공사를 마치고 완공된 백병원 본관 모습

백인제와 유상규, 그리고 도산 안창호

백인제는 친분을 다지기 위해 여러 지인들을 자신의 집에 초대하여 교류했다. 흥사단의 사람들이 백인제 가옥에서 자주 모임을 가졌으며, 안창호, 이광수, 서재필 등도 초대되어 시국과 정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흥사단은 1913년 민족의 자주 독립과 번영을 위해 도산 안창호가 창립한 민족운동단체로 백인제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백인제는 어린시절 안창호의 직·간접적인 영향 아래에 있던 오산학교를 다니면서 이승훈, 이광수의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또 유상규와는 같이 하숙을 하며 지낼 정도로 인간적으로 절친한 사이였다. 유상규는 3.1운동 이후 상하이에 가서 흥단사단에 입단했으며, 안창호의 비서관이 되었다. 이들은 흥사단의 국내 지부격인 수양동우회에서 1926년 5월 월간 ‘동광’을 창간한 이래 1933년 1월 일제에 의해 폐간되기까지 ‘동광’에서 활동한 바 있었다. 비록 백인제는 해방 직후에 정식 흥사단원이 되었지만, 그는 평소 무실역행(務實力行)의 휘호를 즐겨 사용할 정도로 일찍부터 도산 안창호의 무실역행의 사상을 신봉했다.

백인제는 도산 안창호 및 흥사단원들과 교류가 깊었고, 평소에도 무실역행(務實力行)의 휘호를 즐겨 사용했다. 사진은 흥사단원들과 1936년 용봉정에서 야유회를 갖고 기념촬영을 한 것.

최초의 민립공익법인 ‘재단법인 백병원’ 설립

백인제 박사는 1946년 11월 조국에 대한 애국심과 높은 뜻으로 그동안 병원 운영을 통해 마련한 전 재산을 기부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민립 공익법인인 재단법인 백병원을 설립했다. 설립 당시 이사는 백인제, 김희규, 백붕제, 박병래, 기용숙 박사가 선임되었으며, 감사는 공병우, 백기호 박사가 선임되었다. 정관에는 인술제세(仁術濟世)의 이념 아래 인술(仁術)로써 겨레와 인류를 구한다는 것, 의학 연구와 교육, 특히 교육을 통해서 나라와 겨레를 구할 인재를 양성한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선진국인 미국에서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철강으로 재벌이 된 카네기가 미국 최초로 부를 사회에 환원, 카네기재단을 설립하여 자본주의사회에서 소외된 불우한 국민의 교육, 문화, 복지(카네기재단, 카네기 멜론 대학 설립)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후에 록펠러, 포드 등 여러 재벌들이 이를 본받음으로써 미국에서 오늘날과 같은 자본주의의 꽃을 피워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민립공익법인인 재단법인 백병원도 미국의 카네기재단에 필적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우리나라 같이 여러 변수들이 잠복해 있는 당시의 복잡한 사회에서 자신의 병원을 재단법인화 하는 선각자적인 모습을 보인다. 백인제 박사가 오랫동안 역사에서 빛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능력과 학문적 업적 이외에 그러한 자신 희생적이고 선구자적인 결단 때문일 것이다.

1947년 1월 1일 경향신문. '백인제병원을 재단법인으로 한다'는 보도기사.
외과의술계의 권위 백린제 박사가 경영하는 서울 저동2가 백병원은 이번에 1천3백56만원 재단법인으로 개조하는 동시에 의학연구기관 설치, 의학연구 장학금 제도 등 여러가지 사업으로 재출발을 하기로 되었다한다.

경제·문화·정치 등 다양한 활동 전개

백인제는 병원을 재단법인화한 후 의료뿐만 아니라 경제·문화·정치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경제 방면에서는 조선산업진흥주식회사를 통해 무역업에 관여하기도 했고, 문화 방면에서는 1947년 10월 ‘수선사’라는 출판사를 열어 책 20여권을 출판하고, 변호사인 동생 백붕제로 하여금 ‘수선서림’이라는 서점을 경영하게 하였다.

정치 방면에서는 1948년 5·10총선거에 스스로 무소속으로 입후보하기도 했으며, 1948년 6월에는 서재필 박사 대통령 추대운동에 참여하였다.

서재필은 해방직후인 1947년 미군정장관의 초청으로 귀국하여 과도정부의 최고정무관이 되었다. 귀국 직후 백인제 박사의 자택을 방문하여 기념촬영을 했다.

해방에서 납북까지

1945년 해방이 찾아왔다. 백인제 박사는 해방된 이 땅에서 의학자와 의료계 지도자로서 자신의 역량을 십분 발휘하였다. 경성의학전문학교의 재건과정과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탄생과정에 큰 몫을 하여 우리나라 의학교육과 연구의 든든한 토대를 마련했다. 또 대한외과학회의 초대-3대 회장으로 우리나라 외과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각급 의사회 탄생과 초기 운영에 핵심적으로 관여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의 전 재산을 쾌척하여 재단법인 백병원을 설립함으로써 바람직한 의사상을 제시하는 위엄을 이루었다.

해방공간에서 백인제의 역할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정치적으로 적지않은 활동을 하였고, 흥사단의 열성적인 지도자로 도산과 자신의 이념을 현실화하는데 헌신하였다. 하지만 백인제 박사는 공산군 점령 20여일만인 1950년 7월 19일 체포되어 동지들과 동생 백붕제와 함께 납북되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1960년대의 백병원 모습

백인제 家

백인제는 북촌에 거주하며 총 네곳에서 생활했다. 처음으로 터를 잡은 곳이 중학동 80번지(한옥, 1928~1932)이고 가회동 1-31번지(문화주택, 1932~1940)와 저동 2가 85번지(백병원 사택, 1940~1944)를 거쳐 현재의 위치인 가회동 93-1번지(한옥, 1944~2009)로 옮겼다.

당시 백인제 가옥에는 흥사단 사람들이 자주 모임을 가졌다고 한다. 안창호, 이광수, 서재필 등이 백인제 가옥에서 열린 가든파티에 초대되어 시국과 정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백인제 박사 납북 이후 아내 최경진 여사는 1944년부터 거의 60여 년의 기간 동안 이곳에 머물며 백인제 가옥을 원형에 가깝게 보존하였다. 백인제 가옥은 근대적으로 변용된 한옥의 양식을 잘 보존하고 있으며 1977년 민족문화재 제22호로 지정, 현재는 서울역사박물관 분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현재의 백인제 가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