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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제대학교 백병원 법인 로고  사진입니다 인제대학교 백병원 법인 로고  사진입니다

백병원의 도약

병원 현대화 바람과 위기의 서울백병원

오랜 우리 민족사 중에서도 한국전쟁은 가장 참혹한 시련 가운데 하나였다. 전쟁은 모든 것을 황폐화시켰다. 1952년의 백병원은 설립자 백인제박사가 납북되자, 존립이 위태로운 형편이었다.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백병원의 옛 영광을 지키며 명성을 유지하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했지만 1950년대 후반 이후 백병원은 점차 쇠락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백병원이 중소병원 규모의 현상유지에 그쳤던 반면, 서울 곳곳에서는 신생 대규모 종합병원이 신설되었다. 이미 1950년대에 세브란스병원이 세워졌고, 길 건너편 명동 입구에 1962년 명동 가톨릭 성모병원, 1968년 필동 성심병원이 세워졌으며, 을지로 5가에 국립의료원이 신축되어 1960년대 중반까지 서울지역에만 이미 17개 사립병원과 69개의 병원이 들어섰다.

백병원을 살리기 위해 제일 먼저 실천한 일은 몸집 줄이기였다. 솔선수범하여 월급을 적게받고, 병원 신축을 위한 자금을 적립했다. 또한 기존 일반외과 중심의 백병원 이미지에서 탈피하여 종합외과병원으로의 전환을 꾀하기 시작했다. 일반외과 뿐만 아니라 부인과, 비뇨기과, 흉부외과, 정형외과, 신경외과(단순개두술) 등에 전문의를 두었다. 또한 내과, 소아과, 정신과, 안과, 이비인후과, 치과 등 여섯개 과는 지입제(持入制)로 두었다. 지입제란 종합병원 내에 개인이 전세를 드는 것과 같은 방식인데, 재정적 어려움으로 인한 고육지책이었다. 백병원의 재정형편이 조금씩 나아지면서 2년 후에는 지입제를 폐지하였다.

그리고 서울시내 중심가에 위치한 백병원의 특성을 고려해 연중무휴, 24시간 가동하는 응급의료센터를 통해 응급실 환자 유치를 최대한 활용했다. 응급실의 활약으로 수익증대 뿐만 아니라 병원 전체가 활력을 얻게 되었다. 또한 ‘생동감 있는 병원, 젊은 병원’이라는 내용으로 광고를 했는데, 1963년 5월과 7월 사이에 조선일보에만 총 22회의 광고를 게재했다. 진료실에서 회전의자만 돌리며 환자를 만나는 안일한 태도에서 벗어난 적극적인 마케팅이다.

서울백병원, 모체병원으로 토대를 세우다!

7~8년 동안의 노력으로 어느 정도의 건축비용이 모였고, 백병원은 단과병원에서 종합외과병원으로 탈바꿈에 성공하여 예전의 모습을 어설프게나마 되찾아갔다. 하지만 주변에는 온통 최신식 빌딩이었다. 이제는 새로운 종합병원의 신축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재단이사회를 소집, 1960년대 초부터 구상하던 재건계획을 구체화하여 1967년 종합병원 백병원을 건립하기 위한 계획서를 작성하였다.

1970년 4월 1일 서울백병원의 현대화를 위한 착공에 들어갔다. 당시 백낙환 원장은 수술과 외래진료 속에서 틈나는 대로 병원 설계도를 보고 밤낮으로 일했으며, 사촌동생인 백낙조 박사가 독일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백병원이 악조건 속에서도 재건사업을 계획한다는 소식을 듣고 임상연구를 중단하고 귀국하여 함께 서울백병원 건설에 직접 뛰어들어 힘을 보탰다. 이후 백낙조 박사는 1979년에 재단법인 백병원을 발전시켜 백인제 박사의 숙원이었던 학교법인 인제학원을 설립하였으며, 초대 이사장에 취임하게 된다. 

그러나 산 넘어 산이었다. 애초의 공사비를 초과하기 시작했을 뿐아니라 공사비에 충당하고자 했던 토지 매각도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하는 등 공사비 조달에 차질이 생기기 시작했다. 결국 건축비를 제대로 지불하지 못해 건설회사가 몇번인가 바뀌었고, 완불하지 못했던 건축비는 개원 후 성심성의껏 갚아 나가겠다는 서약을 한 후에야 준공할 수 있었다.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1972년 3월, 7층까지 부분 준공하여 가사용 허가를 받고, 16개과 140병상의 현대식 종합병원을 개원했다.

1973년에는 인턴 및 단과 수련병원으로 인정받았고, 1974년에는 인턴 및 레지던트 수련병원으로 인정되어 명실상부한 교육병원으로 발돋움했다. 병원도 2단계로 8층, 1975년 3단계로 현재의 13층을 완성하였고, 이에 따라 병상 역시 300, 400, 500병상으로 늘려갔다. 이렇게 현재 지상 12층, 지하 2층의 서울백병원은 3단계로 나누어 장장 6년에 걸친 공사 끝에 1975년 3월에야 현재의 모습을 완공했다.

인제의대 설립과 부산백병원 개원

천신만고 끝에 1975년 서울백병원이 현재의 모습으로 완공하고 현대화되자 수익도 증가했다. 백병원의 직원들은 올바르고 성실하고 근면하게 병원을 운영함으로써 최고 수준의 병원으로 인정받았다. 서울백병원 점차 자리를 잡아감에 따라, 이를 바탕으로 제2의 도약을 계획하였다. 창립자 백인제 박사가 꿈꾸었던 교육 분야로의 진출이었다.

때마침 1977년 정부에서 민간병원의 건립을 지원하는 계획을 발표하였다. 정부는 지방의 의료취약지구와 공단지역의 의료시설에 대한 지원을 하면서 의료기관에 행정·재정지원의 기회를 제공했다. 그래서 전국적으로 당시의 다섯개 대형병원이 나누어 지방의료시설 확충에 참여하기로 하여 백병원은 부산 사상지구를 맡게 되었다. 그동안 의과대학 설립과 제2,제3백병원 건설의 기회를 기다리던 우리에게 정부의 이런 제안은 희소식이었다.

당시 서울에는 의과대학이 7개나 있었고, 전남지역만 해도 2개의 의과대학이 있었지만 부산·경남지역에는 부산의대 한곳뿐이었다. 여러 곳을 답사한 끝에 현재의 개금동에 의과대학과 부속 부산백병원 부지를 장만하였는데 겨우 3,766평이었다. 지금은 지하철이 들어오는 등 변화가가 되었지만 당시의 개금동은 저소득층이 몰려 사는 곳이었다. 인구밀도가 높고 질병환자가 많아 의료수요가 많을 수밖에 없고, 또한 사상공단과의 거리도 2~3킬로미터 밖에 되지 않아 정부가 요구하는 조건에도 부합되는 부지였다. 1978년 3월 보건사회부는 부산백병원 설치를 확정하였고, 이에 맞춰 백병원에서도 지하1층 지하9층 6,225평(500병상)의 설계를 완성하였다.

의과대학의 설립과 부산백병원 건설공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1978년 10월 문교부로부터 인제의과대학 설립계획이 승인되고, 1979년 1월 학교법인 인제학원 설립허가 및 신입생 80명 정원의 인제의과대학 설립인가를 취득하여 1979년 2월에는 80명 정원의 의예과 신입생을 후기로 선발할 수 있었다. (학교법인 인제학원 문교부 정식 허가. 1979.1.12. 설립자 대표 백낙조)

1946년 12월 17일 설립한 재단법인 백병원은 서울백병원과 부산백병원을 모체로 하는 학교법인 인제학원으로 새롭게 태어났으며, 아울러 백중앙의료원이 탄생하였다. 학교법인 인제학원 초대 이사장에 백낙조 이사장, 백중앙의료원 초대 의료원장에 백낙환 이사가 선임되었으며, 초대 학장에는 창립자 백인제 박사의 수제자 중 한분인 전종휘 박사가 취임하였다. 학교명칭은 인술로써 세상을 구제한다는 백병원의 창립이념인 인술제세(仁術濟世)의 仁字와 濟字를 따서 '仁濟醫科大學'으로 결정하였으며 이는 창립자의 함자인 인제(麟濟)와도 음(音)이 같다.

한편, 부산백병원은 1978년 2월에 착공하여 대학병원 건축사상 최단 기간인 1년 4개월 만에 부분 준공하여 1979년 6월 1월 300병상으로 개원하였고 최하진 박사가 초대 원장의 어려운 직책을 맡아주었다. 많은 교직원이 밤낮없이 열정적으로 매달린 값진 결실이었다. 서울백병원의 완공에 7년이 걸렸다는 사실과 비교하면 백병원 교직원들의 잠재 역량이 얼마나 성장해 있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부산백병원을 만든 사람들

1979년 6월 1일 부산백병원이 문을 열자 서울에서 유명한 백병원의 부산시대가 열렸다고 지방신문에 대서특필되었다. 종합병원이라고 할 만한 것은 부산의대 부속병원 밖에 없던 부산에 신기원이 열린 것이다. 부산의 중환자가 경부고속도로를 달려 서울까지 가지 않아도 되는 계기를 우리 백병원이 마련한 것이다. 환자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부산백병원을 찾았다. 개원을 하면서도 예상하지 못했던 폭발적인 반응이었다. 서울백병원의 명성을 익히 아는 부산시민과 인근 양산, 김해 등지의 환자들 덕분이었다. 덕분에 부산백병원은 개원 첫해부터 흑자를 내면서 부산 최고의 병원으로 빠르게 자리매김했다. 부산백병원이 부산에서 빨리 자리를 잡으려면 다른 병원과의 차별화된 전략이 필요했다. 환자중심의 병원, 젊은 스태프들이 열성적으로 진료하는 것을 특징으로 내세웠다. 전직원에게 친절교육을 시켰고, 진료비나 입원비에 연연하지 말고 ‘무조건 진료’의 원칙을 내세웠으며, 개업의 등과 연계도 잘 갖추어 놓았다. 그래서 개인병원이나 다른 종합병원에서 다루기 힘든 환자가 옮겨오는 경우 최선을 다하였다. 또한 서울백병원 때부터의 원칙대로 응급환자는 절대 돌려보내지 않았다.

부산백병원은 명성대로 신경외과와 흉부외과 수술환자가 당시 서울을 제외하고 전국 최다를 기록하기도 하였다. 많은 사람들의 염려를 뛰어넘는 성공이었다. 그러나 우리와 같은 시기 정부지원 프로젝트에 의해 세워진 다른 민간병원들의 사정은 상당히 달랐다. 조사 결과 55%의 병원이 적자운영을 했고, 평균 부채의존도가 99.3%에 달했으며, 차관원리금 상환도 전반적으로 저조하여 67%의 병원이 50%의 상환률을 보였다. 이런 점에서 의료계는 부산백병원의 성공이 이례적인 경우라고 평가했다.

부산백병원의 성공은 훌륭한 인적자원 덕분이다. 우수한 의료진의 포진은 다른 병원과의 경쟁에서 가장 중요한 쟁점이 된다. 부산백병원 성공의 배후에는 장기려 박사와 최하진 박사의 도움이 컸다. 그리고 당시 부산시민들에게 존경을 받았던 한국의 슈바이처 장기려 박사가 우리를 전폭적으로 도와주었다. 4~5년 동안 수술을 함께하고 건강이 허락하는 최후의 순간까지 일주일에 한번 직접 진료를 해주시어 많은 후배 의사들의 귀감이 되셨다. 부산백병원을 담당할 의료진 구성은 서울백병원의 지원만으로는 일정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고, 의료진은 기본적으로 부산에서 활동해야 하기 때문에 교수진 선발에 어려움이 있었다. 그 과정에서 최하진 박사가 많은 역할을 하였다. 그 외에도 전종휘 초대학장, 성호석, 심재홍, 이순용, 이송희, 김종성, 강창일, 김상효, 정정명, 이영구, 김현찬, 이희철, 홍관희, 주종수 교수 등으로 이들은 백병원 일을 자신의 일처럼 알고 헌신했다. 이런 훌륭한 인재들의 주인의식이 백병원을 순풍에 돛을 단 배처럼 순항하게 했다.

인제의과대학에서 종합대학 ‘인제대학교’로 발전

1979년 서울백병원과 부산백병원을 부속병원으로 하여 인제의대를 설립하였지만, 궁극적인 목표는 종합대학으로 발전시켜 민족의 대학으로 키우는 것이었다. 종합대학 설립은 이제 갓 설립된 의과대학의 입장에서 보면 요원한 과제였지만 1980년부터 장기발전 계획을 세워 차근차근 실천에 옮겼다.

첫번째 과제는 학교 부지의 확보였다. 그러나 종합대학을 설립하기 위해서 필요한 10만평 정도의 부지를 부산 시내에서 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후 김해와 양산 등지를 알아본 결과 자연경관, 진입로, 부지면적 등 종합적인 사항을 고려해 볼 때, 김해시 어방동 지역이 가장 유력한 후보지로 논의되었다. 20~30 만평을 목표로 하였지만 주변 지역은 토지 주인들의 수가 너무 많아 도저히 사들일 형편이 안되어 부족한대로 11만평의 현재 김해캠퍼스를 갖출 수 있었다. 학교부지가 확보됨에 따라 학과 증설 계획도 활발하게 논의되기 시작했다. 1982년 이사회에서는 교명을 인제의과대학에서 인제대학으로 변경할 것과, 물리, 화학, 생물, 국문, 영문, 일문, 경영학과 등 7개학과 각 40명 정원으로 증설할 것을 결의하여 문교부에 신청하였다. 문교부에서는 교명 변경안에 대해 1984년 3월 1일부로 인제대학으로 명칭을 변경하라는 통보를 했으며, 학과 증설 안에 대해서도 1984 학년도부터 물리, 화학, 생물 3개학과, 각 40명의 신입생을 선발하도록 인가하였다. 이후 매년 학과가 꾸준히 증설되었는데, 1985년 4개학과, 1987 2개학과, 그리고 1988년 7개학과가 신설되었다.

그리고 1988년 10월부터 종합대학 ‘인제대학교’로 승격되었다. 인제대학교는 인술제세(仁術濟世), 인덕제세(仁德濟世)의 건학이념과 정직, 성실, 근면의 교훈 아래, 2020년 10월 현재 11개 단과대학(의과대학, 간호대학, 경영대학, 문리과대학, 사회과학대학, 공과대학, 보건의료융합대학, BNIT융합대학, 약학대학, AI융합대학, 리버럴아츠칼리지)의 39개 학과(부)와 6개 대학원(일반대학원, 보건대학원, 경영대학원, 사회복지대학원, 교육대학원, 상업융합대학원) 1만3천여명의 학생들이 교육받고 있다.